거식증 앓거나 비만인 여성, 신경스테로이드 부족으로 '울적'
등록일 2017년 11월 21일 화요일
수정일 2017년 11월 21일 화요일
▲ 출처=플리커

심신 건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복잡하고 심각한 상태인 식이장애.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생식기능, 신체 및 정신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최악의 경우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식이장애의 하나인 신경성식욕부진증(anorerexia, 이하 '거식증')은 신체가 영양결핍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음식 섭취를 거부하는 장애를 말한다. 반대로 비만은 신체에 과도한 지방을 축적하며 건강상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상태이다. 둘 다 우리 몸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기는 마찬가지다. 최근 한 연구에서 이렇게 체중 스펙트럼의 양 끝에 선 여성들은 신경스테로이드인 '알로프레그나놀론'(allopregnanolone) 수치가 정상인에 비해 현저히 낮게 나타났다.

이전 연구에서 알로프레그나놀론이 부족하면 우울과 불안 증상이 나타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우울증과 불안증은 비만 및 거식증과 연관된 '기분장애'(mood disorder)이다. 이번 연구는 신경세포의 재생과 기능 유지를 돕기 위해 뇌에서 만들어지는 화학물질인 신경스테로이드의 결핍이 기분장애를 유발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알로프레그나놀론은 여성 호르몬인 프로게스테론이 분해돼 생긴 대사산물로, 과학자들 사이에선 흔히 '알로'(allo)로 불리고 있다. 알로프레그나놀론은 뇌에서 신경전달물질인 '감마아미노부틸산'(GABA, gamma-aminobutyric acid) 수용체와 결합하는 데, 이 수용체는 벤조디아제핀(benzodiazepine)과 같은 신경안정제의 표적으로 알려져 있다. 알로프레그나놀론은 GABA가 수용체와 결합할 때 GABA의 작용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GABA는 각성체계의 신경세포 작용에 제동을 거는 억제성 신경전달물질이다. 이완 및 흥분 억제 작용을 해 기분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지만 결핍될 경우엔 불안감을 유발할 수 있다.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 비만인 성인 가운데 43% 이상이 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거식증에 걸린 여성의 50% 이상이 불안이나 우울 증세를 겪고 있다. 이전 연구에서 낮은 알로프레그나놀론 수치와 불안 및 우울증 사이의 연관성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알로프레그나놀론이 비만 여성과 거식증 여성의 기분장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연구된 바가 없었다.

▲ 출처=플리커

일리노이대학교 시카고의과대학의 정신의학과 부교수이자 이 연구의 저자인 그라지아노 피나 박사는 낮은 알로프레그나놀론 수치와 불안, 우울,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등 여러 기분장애 간 연관성을 보여주는 추가 증거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비만인 여성과 거식증을 앓고 있는 여성의 알로프레그나놀론 수치가 낮다는 사실은 알로프레그나놀론이 기분장애에 미치는 영향이 과소평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이번 연구를 이끈 하버드의과대학의 카렌 밀러 교수는 거식증과 더불어 무월경(amenorrhea)을 겪고 있는 12명의 여성(BMI 18.5 미만), 12명의 비만 여성(BMI 25 이상), 12명의 정상 체중 여성(BMI 19~24)을 대상으로 검사를 실시했다. 참가자 가운데 과거 우울증 진단을 받았거나 현재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는 여성은 없었다. 전체 참가자의 평균 연령은 26세였다.

참가자들은 자신의 불안과 우울 증상의 강도를 자가평가해 설문지에 기입하고 혈액 샘플을 채취했다. 그 결과, 비만 여성과 거식증을 앓고 있는 여성의 혈중 알로프레그나놀론 수치는 BMI가 정상인 여성보다 50% 낮았다. 또한 임상적으로 비만인 여성들은 정상 체중인 여성보다 혈중 알로프레그나놀론 수치가 약 60% 낮았다.

게다가 모든 참가자들에게서 자가평가한 불안 및 우울 강도와 알로프레그나놀론 수치 간에 상관관계가 나타났다. 설문지 작성 당시 불안 및 우울 증상이 심하다고 답한 참가자들은 알로프레그나놀론 수치가 낮게 나왔다. 게다가 수치가 가장 낮은 여성이 우울증 증상도 가장 심각했다.

프로게스테론 수치는 모든 참가자들에게서 동등한 수준으로 낮게 나타났다. 이에 따라 비만 여성과 거식증을 앓고 있는 여성에서 나타난 알로프레그나놀론 감소 원인을 프로게스테론의 대사를 담당하는 효소가 제 기능을 하지 못 한데서 찾을 수 있게 됐다.

거식증을 앓고 있는 여성들은 무월경 병력이 있기 때문에 성호르몬인 프로게스테론 수치가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비만 여성들과 정상 체중인 여성들의 프로게스테론 수치가 낮았던 이유는 프로게스테론이 자연적으로 낮은 시기인 난포기(follicular phase)에 채혈을 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피나는 비만 여성들의 알로프레그나놀론 수치가 정상 체중인 여성들보다 낮았다는 점에 주목하며, 알로프레그나놀론은 프로게스테론 분비와 상관없이 불안 및 우울증과 연관돼 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이 연구는 프로게스테론을 알로프레그나놀론으로 전환시키는 효소가 제 기능을 하지 않아, 체내에 알로프레그나놀론이 부족해지면서 기분장애를 일으킬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 피나 박사는 효소의 기능을 강화하는 약물을 투여하면, 체내에 알로프레그나놀론이 늘어나면서 기분장애 발생을 줄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기분장애 발생을 억제할 신 약물이 개발될 가능성을 내다본 것이다. 이어 그는 프로게스테론을 알로프레그나놀론으로 전환하는 대사과정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며, 이렇게 되면 알로프레그나놀론을 바이오마커로 사용하는 정밀 약품이 제조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오늘날 비만과 거식증을 앓고 있는 여성들 사이에서 우울증이 점점 더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기분장애를 유발하는 기전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취지에서 수행된 이번 연구는 새로운 표적치료법 등장의 발판이 될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김현영기자  
릴레이 인터뷰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