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V 감염 검사(출처=셔터스톡)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은 전 세계인의 주요 사망 원인 중 하나이다. 우리 몸은 바이러스나 세균이 침입하면 이들을 퇴치하는 면역체계를 즉각 가동한다. 그런데 HIV는 이름처럼 인체의 면역세포를 파괴해 면역력을 약하게 만든다. HIV에 감염된 후 제대로 치료를 받지 않아 면역세포가 일정 수준 이하로 줄어들면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AIDS)에 걸리게 된다. 2016년 기준으로 전 세계 인구 가운데 HIV 감염자 또는 AIDS 환자는 약 36.7%에 달했으며, 같은 해에 100만명이 AIDS 관련 질환으로 목숨을 잃었다.

HIV에 감염됐어도 치료를 잘 받으면 면역력을 적절히 유지할 수 있다.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은 항레트로바이러스요법(Antiretroviral therapy, ART)이다. 이 치료법은 HIV의 증식을 억제해 바이러스 수치를 낮게 유지하면서 AIDS로 진행하는 것을 최대한 지연해 준다. 덕분에 AIDS는 불치의 병이 아닌 관리 가능한 질환이 됐다. 효과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HIV 감염의 조기 진단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최근 연구에서도 HIV 감염에 대한 조기 진단과 더불어 항레트로바이러스요법을 이용한 조기 치료가 HIV 감염으로 인한 뇌신경 손상 위험을 낮추는 것으로 나타났다.

HIV 감염 조기 진단의 중요성

HIV 감염 초기에 환자를 찾아내어 치료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조기에 감염이 진단되지 않으면 환자 본인도 감염 사실을 모른 채 다른 사람에게 HIV를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유엔에이즈합동계획(UNAIDS)에 따르면, HIV 감염자 가운데 약 60%만이 자신이 감염된 상태임을 알고 있다. 나머지 40%는 감염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로 다른 사람에게 바이러스를 퍼트릴 수 있다는 뜻이다. 특히 빈곤 지역에서 HIV 검사를 받지 못해 감염 사실을 모르는 감염자가 많다고 한다.

HIV에 감염되면 2~4주 내에 임상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초기에 급성 HIV 증후군을 겪은 후 겉으로 증상이 드러나지 않는 잠복기를 거쳐, 결국 면역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기회감염과 악성종양에 취약한 AIDS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급성 HIV 증후군은 발열, 두통, 인후통, 관절통, 근육통, 피부 발진 등 마치 독감을 앓는 듯한 증상이 나타난다. 이 시기부터 HIV는 우리 몸에 있는 면역세포인 CD4 양성 T-림프구를 공격해 파괴하기 시작한다. 특히 감염 초기에는 혈중 바이러스 농도가 높아 전염 위험이 매우 크다.

만성 HIV 감염 시기, 즉 무증상 잠복기 동안에도 HIV는 체내에서 서서히 증식하며 계속해서 면역세포를 파괴한다. 표면적으로 임상 증상이 아예 나타나지 않거나 증상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가볍게 지나가는 이 시기에도 HIV는 지속적으로 수를 늘리며, 인체의 면역력은 점차 저하된다. 아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 HIV 감염을 생각지도 못하는 사이 다른 사람에게 바이러스를 전파할 수 있다는 것도 문제다.

HIV 감염의 가장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후천적으로 인체의 면역력이 고갈된 상태가 되면, 각종 기회감염과 악성종양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기회감염이란 건강한 사람에게는 감염 증상을 유발하지 않는 바이러스나 곰팡이, 기생충, 세균 등이 면역력이 급격히 저하된 사람에게 심각한 감염 증상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HIV 감염자는 바이러스 자체보다는 결핵과 폐렴 같은 기회감염 때문에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보건 전문가들은 조기에 감염자를 선별하여 항레트로바이러스요법으로 치료할 것을 권고한다. 이 치료법은 HIV 감염이 AIDS로 진행하는 것을 지연시킬 뿐만 아니라 기회감염, HIV 관련 특정 암, 뇌와 척수를 손상시킬 수 있는 질환의 발병 위험을 감소시키기도 한다.

조기 치료로 HIV 감염에 따른 뇌 손상 막을 수 있어

HIV는 우리 몸의 면역체계 외에도 두뇌를 공격해 손상을 입힌다. HIV에 감염되면 특정 뇌 부위의 부피와 피질의 두께가 감소하는데, 이는 신경학적 문제를 일으킬 위험이 있다. HIV 감염을 치료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는 항레트로바이러스요법이 HIV에 의해 유발되는 뇌손상을 멈추는데 효과적임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나와 관심을 끈다. 캐나다 맥길대학교(McGill University)의 연구원들은 미국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 St.Louis) 및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의 연구원들과 함께 항레트로바이러스요법이 HIV 감염자에서 신경학적 문제를 예방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팀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소재 캘리포니아대학교(University of California)에서 HIV에 감염된 이후 1년이 지나지 않은 65명의 감염자들의 뇌를 자기공명영상(MRI) 장치로 스캔한 영상을 분석했다. 이를 HIV에 감염된 이후 적어도 3년이 지난 감염자 16명과 HIV에 감염되지 않은 정상인 19명의 MRI 영상과 비교했다. 그 결과, HIV에 감염된 후 치료를 받지 않은 기간이 길수록 여러 뇌 부위의 부피가 더 많이 줄고 피질의 두께가 더 얇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복합 항레트로바이러스요법으로 치료를 진행하자 뇌 부위의 부피가 더 이상 줄어들지 않았고, 전두엽과 측두엽의 피질 두께가 약간 증가하는 것이 관찰됐다.

이번 연구 논문의 제1저자인 맥길대학 몬트리올신경연구소(Montreal Neurological Institute)의 라이언 샌퍼드 연구원은 "이제까지 HIV 감염 초기에 대한 종단 구조 신경영상 연구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비교적 큰 표본에서 이렇게 민감한 분석 방법을 사용한 연구는 이번이 처음이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 그는 "이번 연구 결과는 조기 치료에 대한 신경학적 사례인 동시에 HIV 감염자들에게 복합 항레트로바이러스요법으로 더 이상 뇌가 손상되지 않게 보호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보냈다"고 강조했다.

샌퍼드의 말대로 이번 연구 결과는 HIV 감염을 조기 발견하여 복합 항레트로바이러스요법으로 치료하면 HIV로 인한 뇌 손상을 예방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게다가 HIV에 감염되고 즉각적인 치료를 받지 못한 환자의 경우에도 복합 항레트로바이러스요법으로 치료를 시작하면 병의 진행을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가 HIV에 감염된 후 치료를 받지 않아 발생하는 뇌 손상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위한 길을 열었다고 자평했다.

▲뇌 스캔 영상(출처=셔터스톡)

HIV 감염에 따른 신경학적인 합병증

치료되지 않은 HIV 감염은 진행 단계에서 종종 눈에 띄는 신경학적 합병증을 일으킨다. 전체 AIDS 환자의 약 50%가 다음과 같은 신경학적 문제들을 경험했다고 보고했다.

1. 치매(Dementia): 치매에 걸리면 생각하고, 기억하고,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2. 신경병증(Neuropathy): HIV 감염은 신체의 모든 신경을 손상시켜 말초신경계의 기능적 장애 및 병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3. 정신질환(Psychiatric Disorders): 뇌 손상은 불안과 우울증을 포함한 정신적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심지어 일부 환자는 행동의 변화나 환각을 경험하기도 한다.

4. 신경매독(Neurosyphilis): 성행위를 통해 전염되는 매독균은 뇌, 수막, 척수를 감염시켜 신경매독을 일으킬 수 있다. HIV에 의해 면역체계가 손상되고 매독이 급속히 진행된 이후 신경매독이 발생하며, 치매, 시력 및 청각 상실, 보행의 어려움 등을 유발한다.

5. 감염(Infections): 면역체계가 약화되면서 중추 신경계는 진행성 다초점 백색질 뇌증(progressive multifocal leukoencephalopathy), 크립토콕쿠스 뇌막염(cryptococcal meningitis), 대상포진 등에 감염되기 쉽다.

[메디컬리포트=김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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